유류세 최고가격제 (가격신호, 수요억제, 핀셋지원)
미·이란 전쟁 이후 국제 경유 가격이 215% 폭등했는데, 정작 국내 주유소 가격은 리터당 2,000원 선에서 묶여 있습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저도 솔직히 "선방이다"라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도감이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가격신호가 사라지자 제가 한 행동
퇴근길, 평소보다 유독 길게 늘어선 주유소 대기 행렬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일부터 기름값 오르나 보다" 싶어 저도 슬그머니 줄에 합류했는데, 당시 제 차 게이지는 절반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서 가득 채웠고, 실제로 아낀 돈은 고작 4,000원 남짓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행동이 딱 현재 최고가격제의 부작용을 몸소 증명한 셈입니다.
정부 통계를 보면 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2차 최고가격 고시가 예정됐던 3월 넷째 주, 주유소 휘발유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5.3% 늘었습니다. 가격 인상 직전에 수요가 오히려 폭발하는 이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수요 전이(Demand Shifting)라고 부릅니다. 수요 전이란 가격 변동이 예고됐을 때 소비자가 구매 시점을 앞당기거나 늦추는 행동을 뜻합니다. 소비 총량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타이밍만 바꾸는 것이죠.
문제는 이게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차 고시 이후 첫째 주에 판매량이 전년 대비 13.2% 줄었다가, 3차 고시가 예정된 둘째 주에는 감소폭이 11.3%로 다시 좁혀졌습니다. 고시 주기마다 이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격이 눌려 있으니 소비자는 절약보다 타이밍을 계산하는 데 더 집중하게 됩니다. 저도 그랬고요.
수요억제 실패가 만드는 더 큰 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와 이번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뚜렷합니다. 러·우 전쟁 당시 국제 휘발유 가격은 42% 올랐고 국내 가격도 23% 따라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국제 가격이 97% 뛰었는데 국내 가격 인상률은 18%에 그쳤습니다. 갭이 훨씬 크다는 뜻입니다. 전문가들이 더 걱정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러·우 전쟁은 공급 차질이 있었지만 대체 공급원을 찾을 여지가 있었습니다. 반면 미·이란 전쟁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이라는 구조적 공급 위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Hormuz)이란 전 세계 원유 해상 운송의 약 20%가 통과하는 중동의 병목 구간입니다. 이 길이 막히거나 위험해지면 공급량 자체가 줄어들기 때문에, 가격 신호를 통해 수요를 억제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국내 상황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가격 탄력성(Price Elasticit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가격 탄력성이란 가격이 변할 때 소비자의 수요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최고가격제는 이 탄력성이 작동할 여지를 인위적으로 축소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는 위기의 심각성을 가격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아직 버틸 만하다"는 착각 속에서 운전대를 계속 잡게 됩니다. 제 경험상 이게 가장 무서운 부분입니다.
특히 유종별 수요 변화를 살펴보면 걱정이 더 커집니다. 경유가 휘발유보다 더 많이 줄었다는 사실은, 생계형 운전자와 물류 업계가 더 큰 압박을 받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레저나 통근용 휘발유 소비는 유지되면서 생업이 걸린 경유 소비가 먼저 깎이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보편적인 가격 억제가 정작 보호해야 할 사람들에게 충분한 방패막이 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핀셋지원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
정유사 손실 보전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정부는 최고가격제 시행으로 정유사가 입은 손실을 세금으로 메우겠다고 했습니다. 이를 가격 보전(Price Subsidy)이라고 부릅니다. 가격 보전이란 시장 가격과 통제 가격의 차액을 정부가 공급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소비자 부담을 낮추는 대신 재정 부담을 국가가 떠안는 구조입니다. 문제는 현물 시장의 고유가가 본격적으로 국내 도입 원가에 반영되기 시작하면, 이 보전 금액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는 점입니다.
결국 지금 아낀 기름값을 나중에 세금으로 되돌려 내는 구조입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으로는 에너지 위기를 버텨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는 방향은 이렇습니다.
- 최고가격제를 단계적으로 해제해 가격 신호를 시장에 돌려주고, 소비자가 에너지 위기의 실체를 체감하게 한다.
- 유류세 인하 혜택을 전 국민 일괄 적용 대신, 생계형 운전자·저소득층 대상 에너지 바우처(Energy Voucher)나 유류 쿠폰 방식으로 전환한다. 에너지 바우처란 취약계층에게 에너지 구입 비용을 지원하는 현금성 복지 수단입니다.
-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병행해 수요 감축 효과를 보완한다.
한국에너지공단의 에너지 통계 자료(출처: 한국에너지공단)를 보면, 과거 유류 충격기에 가격 기능이 유지됐을 때 에너지 소비 감소 속도가 가격 개입 시기보다 뚜렷하게 빨랐다는 패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고가격제가 단기 물가 안정에는 효과가 있지만, 중장기 수요 관리에는 역효과를 낸다는 분석과 일맥상통합니다.
산업통상자원부 오피넷 데이터(출처: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서도 이번 고시 주기별 판매량 등락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치를 보면 소비자들이 절약하는 게 아니라 인상 직전에 미리 채우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정부가 서민 경제를 보호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건강해지라고" 2개월 아기에게 떡국을 먹인 것처럼, 좋은 의도가 잘못된 방식과 만나면 되레 더 큰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가격 신호는 시장에 돌려주되, 그로 인해 직격탄을 맞는 취약 계층에게는 핀셋으로 정밀하게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할 때입니다. 에너지 위기는 이미 시작됐고, 인위적인 보호막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충격 흡수 여력은 더 빠르게 소진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경제·금융 조언이 아닙니다. 에너지 정책 관련 공식 정보는 산업통상자원부 및 한국석유공사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참고: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41614050001047?dtypecode=pancode_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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